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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404호)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
성명 : 이인환 (ihlee4441) [ihlee4441@hanmail.net] 입력일시 : 2018-08-25 08:31:50 조회 : 43 

(국보 1404호)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


* 조선 사대부와 명나라 사신의 시詩 대결인 창화시倡和詩
조선 세종 32(1450)에 명7대 황제 경제景帝 (재위 1449~1457)의 즉위를
조선에 알리러 온 명나라 사신과 그를 맞이한 조선의 원접사遠接使 사이에
주고받은 시인 창화시倡和詩를 모아 두루마리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이 시권에는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1415~1479)의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
이에 화답한 원접사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화설제등루부和雪霽登樓賦
]2편의 부33편의 시를 포함, 35편의 글이 담겨 있다.
시는 예겸이 15, 정인지鄭麟趾 (1396~1478)와 신숙주가 각각 6,
성삼문成三問 (1418~1456)5편을 남기고 있는데,
모두 직접 쓰고 자신들의 도장을 찍었다.
조선 전기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자료는 당시 조선과 명 사이의
생생한 외교 관계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이 직접 쓴 글씨를 살펴 볼 수 있어
조선 전기 서예사書藝史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된다.
 
이 시권의 겉표지에는 명예문희공 봉사조선창화시권明倪文僖公奉使朝鮮倡和詩卷이란
제첨題籤과 함께 光緖乙巳重裝’, ‘唐風樓藏이라고 표기되어 청() 광서 31(1905)
당풍루唐風樓란 서실書室을 갖고 있었던 청말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 (1866~1940)
원본을 다시 꾸민 것임을 말해준다. 두루마리를 펴면 맨 앞에는 예겸과 같은 시대의
왕숙안王叔安이 전서체篆書體로 쓴 봉사조선창화시책奉使朝鮮倡和詩冊이란 글씨가
나오고, 뒤에는 청의 당한제唐翰題와 나진옥이 쓴 발문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1958년에 작성된 김상기金庠基, 이병도李丙燾,
김두종金斗鍾, 이용희李用熙, 전형필全鎣弼, 원충희元忠喜 6인의
감정기鑑定記가 실려 있다.
 
* 조선과 명의 조공 관계의 시작
평민 출신으로서 명 제국을 건설한 태조太祖 (재위 1368~1398) 주원장朱元璋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외교 관계에서도 그는 조선이 북원北元 (주원장에게 쫓겨
몽골 지역으로 간 원나라의 잔여 세력)과 계속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외교문서에 불경한 어구를 썼다는 생트집을 잡아 조선의 사신을 억류하거나
입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반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조선으로서는
당시 동아시아의 최강국인 명의 승인을 얻어야만 조선 건국을 합법화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1년에 세 번 사신을 파견할 수 있도록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명 태조의 강경한 입장은 계속 되었고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명과 조선의 관계는 우호적이고 정상적인
책봉-조공冊封-朝貢 관계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 명 경제의 즉위를 알리러 온 칙사 예겸과 그 의미
1450(세종 32) 예겸倪謙은 명 경제의 즉위를 조선에 알리러 왔다.
그 전해에 몽고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瓦剌 에센Esen -也先이 명을 침입해 오자,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왕진王振이 명의 6대 황제 영종英宗
(재위 14571464)에게 5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나설 것을 권하였다.
영종은 친정親征에 나섰으나 토목보土木堡에서 추격해 오던 오이라트 군에게 포위되어
포로가 되고 만다. 영종이 포로가 되자 그의 동생이 등극하게 되는데 그가 경제이다.
 
한림원시강 예겸이 부사 사마순司馬恂과 함께 경제의 등극조서登極詔書를 반포하기 위해
북경을 떠난 것은 14491213일의 일이다. 북경에서 요양까지 27,
요동에서 한양까지 21, 한양에서 머문 것이 20, 다시 한양에서 요동까지
14일이 걸리게 된다. 예겸이 조선 사행길에 지은 글들을 모아 1469년에
요해편遼海編을 출판하였는데, 3권 조선기사朝鮮紀事에는
110일 요동에서 출발하여, 한성에서 머물고, 다시 23일 압록강으로 돌아오는
50여 일간의 여정이 일기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요해편의 1, 2권에는 북경에서 한양,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왕복 과정에서의
풍광과 감상 등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어 양자를 함께 살펴보면
당시 사절단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다. [
봉사조선창화시권은 이 여정 가운데 한양에 들어와 성균관 선성묘宣聖墓에서
배알하는 일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압록강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일정에서
주고받은 시를 가려 뽑아 엮은 것이다.
 
예겸이 조선 사신단의 정사正使로 선발된 이유는 그가 당대의 동료들로부터
유학과 문장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일류의 문학지사文學之士로 평가 받았고
관직이 황제의 최측근인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으로 조중 관계를 잘 조정할 수 있는
인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예겸이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되기 전에는
주로 환관들이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온갖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문학지사의 조선 파견은 조선에서는 더욱더 갈망하던 일이었다.
이로 인해 예겸의 출사 소식은 조선을 긴장시켰고,
당대 최고의 문학지사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에게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던 것이다.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출신 관료들로서
당시 정인지는 55, 신숙주는 34, 성삼문은 33세였다.
명의 사신 예겸은 36세였다. 예겸이 조선의 국경에 들어온 후 기행시는 여러 편 지었으나,
조선의 접반사와 시를 주고받은 것은 성균관 선성묘宣聖墓에 참배한 이후부터였고
양자 사이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시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시를 주고받은 초기에는 서로에 대한 탐색과 미묘한 대결 구도가 펼쳐졌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정을 쌓으며 상대에 대한 문학적, 인격적인 존경심을
나타내며 헤어질 때는 서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예겸은 정인지에 대해 그대와의 하룻밤 대화는 10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하며 감탄하였고 자신과 나이가 비슷했던 신숙주와 성삼문을 사랑하여 형제의 의를
맺기까지 했다고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載叢話에 언급되어 있다.

* 주고받은 시를 통한 조선과 명의 자존심 대결
명나라 사신과의 문학적 교유交遊는 단순히 조선 사대부 한 개인의 친분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 사신과의 교유를 통해 조선의 높은 문화 수준을
중국에 널리 알릴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명나라 측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실제로 예겸의 시에 대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의
품격 높은 화답은 예겸을 놀라게 하였고, 조선과 명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은
물질적인 공납의 제공뿐 아니라 시문 수창에 응할 인재를 뽑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명이 멸망할 때까지 오랫동안
명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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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18-08-26 13: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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